삶은교회 개척기

예배는 삶으로 완성되고, 삶은 사람을 정의한다.

살며 생각하며

새벽예배에 대하여.

시소대디 2022. 9. 23. 06:32

지난 포스팅을 전후해서 손가락을 베었다는 좋은 핑계로 한동안 글쓰기에 손을 놓았다. 실제로 타이핑을 하기 불편했고, 하필 손가락의 관절부위를 베었기에 되도록 구부리지 않고 상처를 금방 낫게 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겸사겸사 잠시 글쓰기를 놓았다. 애초에 이 블로그의 이차적 목적이 하루 한개씩 글쓰기 훈련인 것도 있었는데, 부지런함과 꾸준함이 훈련되지 않은 내게 이는 좋은 핑계가 되어주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다시 끄적이려니 어쩜 이리도 어려운지.

게다가 사실은 손에 잡히지 않는 우울함과 불안함이 있는 며칠간이었기에 잠시간 그냥 내 마음을 내버려두었다. 좀 불안해하기도 하고, 어려워하기도 하고. 그 불안에 반응하는 좋지 않은 습관이 먹는 것인데, 정말 정신나간 사람처럼 먹어댄 것 같다. 그리고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하고 간신히 잠들고는 퉁퉁 부은 얼굴로 늦게 일어나고. 2-3일을 그렇게 지내고 오늘은 피로에 못이겨 잠들고는 새벽에 눈이 떠졌다. 그리고 정신도 함께 번쩍 들었다. 이렇게 보낼 시간이 없는데.

글을 쓰려 PC를 켜는데, 어제 보려다 만 유튜브 메인페이지가 열려있다. 새로고침을 하니 몇몇 유력교회들의 특새(특별새벽기도회)생방송이 송출중이었다. 아, 특새기간이구나. 20여년 전의 나, 정확히는 2001년 고3의 이지섭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근거없는 낙관을 안고 2주간의 특새에 열심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노력없는 열매, 재능에 기댄 단기간의 결과를 하나님의 은혜 내지는 축복, 기도의 열매로 여겼던 것 같다. 그렇기에 짧은 스무살 인생을 점검하는 수능시험에도 '최선'이라 하기엔 많이 모자란 노력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당시의 특별새벽기도회와 자주 열리던 이런저런 기도회, 각종 모임은 나의 신앙을 지탱해주던 중요한 요소였다. 그렇다. 기도회, 예배, 신앙적 사교모임등은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기 위한 일차적 목적을 갖지만 그로 인해 동반되는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통한 뜻밖의 열매들을 맺는다. 그렇기에 '신앙'을 주제로 하는 각종 모임은 유익하며, 교회는 이것을 주관해서 열어야 하는 책임을 갖는다.



사실, 교회가 개척되어져도 새벽예배를 열 자신은 없다. 다른 포스팅에서도 언급했지만, 기본적으로 목회와 설교사역 또한 육체적 노동과 결을 같이 하기에 그 노동을 감당해야 하는 당사자로서의 내가 지속가능한가에 의구심이 있을뿐더러 부교역자가 된 첫 3년을 제외하고 이제껏 10여년의 시간을 새벽기도가 없음에 감사하며(?) 살았던 라이프스타일이었기에. 그와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이 새벽에 쏟아부어주시는 영감과 말씀 앞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맑은 정신력은 이 시간의 특권임을 알고 있기에 고민되고 망설여진다.

사실 나는 정답을 알고 있다.
교회가 하는 일은, 해야하는 일의 명분은 효율이 아니라 타당성이다. 다시 말해, 그 일이 얼마나 효율적일 것인가를 따지기보다 과연 그 일이 옳은가라는 것이다. 효율의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수치화된 결과로서 썩 좋지 않은 결과를 내는 많은 전도와 선교가 재고되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막대한 시간과 물질, 인력을 투입해가며 선교에 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이 지상명령에 비추어 '옳은 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벽에 모이는 예배의 모임은? 목회자인 나를 붙들어줄 뿐더러, 마땅히 해야 할 '옳은 일' 중 한가지이기에 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정답을 알면서도 헤메고 있는, 여전히 나는 그런 사람이다.

이제 곧 마주하게될, 뉴사운드에서 사임 인사를 하는 시간에 내게 마이크가 허락된다면 꼭 전하고 싶은 인사가 있다. 사실 수년전부터 그 시간을 상상하며 마음속에 진심으로 눌러담아 둔 말인데, 아주 오래전에 어디선가 주워듣고 그 뉘앙스만 담아두었다가 몇 년이 지난 후 이찬수 목사님의 설교 중에 인용된 문장으로 메모해둘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용납의 열매이지만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용납의 열매이기도 합니다."

지난 날들의 나 역시 '나'이고, 여전히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나 역시 '나'이다. 이런 나를 인내해주고, 용납해주고, 담아주신 뉴사운드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한편, 앞으로의 나날들에 여전히 미완성일 나를 용납해주고 인내해주실 공동체를 꾸리는 작업중이다. 정답을 알면서도 헤메는 나를 용납해줄, 나와 내 가족들 역시 용납하고 인내해야할 그 누군가를 기다리며...

마음을 다잡고 새로운 하루를 맞이해야겠다.

'살며 생각하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이다  (0) 2022.10.01
인생은 60부터- (부제: Active Senior)  (0) 2022.09.24
칼을 갈다가 손을 베었다.  (0) 2022.09.16
사람 참 많다  (0) 2022.09.10
'강력한' 예배..?!  (0) 2022.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