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교역자로 만나 이제는 형님-아우가 된 아끼는 친구가 있다. 축구를 무척 좋아하고 또 잘하는 친구였는데 교회 형제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축구하기 시작한 자리에서 왕성한 의욕으로 시작했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설렁설렁 뛰는 모습을 두고 '초심!'이라며 반농담으로 던지던 구호가 그 친구와의 인사말이 되어버렸다.
초심- 처음의 마음.
누구에게나 초심은 간직해야할 중요한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 처음 받았던 마음을 간직하지 않고서는 처음과 같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초심을 가다듬음에 있어 몇가지 현실적인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가장 먼저는, 이것이 과연 이대로 지속가능한가이다.
초심은 좋은 것이지만, 초심을 잃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은 어쩌면 그 초심의 의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초심의 의욕은 굉장하다. 당장이라도 무언가 이룰 듯한 기세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그런 에너지로 모든 일을 대할 수 없다. 살아가면서는 분명히 우선순위를 정해야 하는 때가 오고, 그 우선순위는 안타깝게도 실제로 나에게 지금 당장의 안녕을 담보잡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럴 때에도, 나는 초심을 지킬 수 있는가를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운동으로 예를 들자면, 아무리 의욕이 넘친다한들 운동 첫날부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최대한의 근력운동을 하는 것은 '이대로 지속가능한가'를 장담할 수 없다. 때문에 보다 많은 운동량을 감당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대로 지속가능한' 만큼만 하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이처럼 '과연 이대로 지속가능한가?'하는 질문은 초심을 지키는 열쇠가 된다.
두번째로는, 초심이 반드시 모든 것에 있어서 원점으로의 회귀를 의미함이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초심은 처음 마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시간적으로 우리에게는 돌아갈 수 없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기타리스트가 아무리 초심(beginner's mind)을 외친다한들, 기타를 처음치는 '초심자(beginner)'의 피지컬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초심을 외칠 때 우리는 우리의 외적인 상황이 초심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계속해서 기타리스트의 예를 들건대, 이미 연주력이 성장해 있는 기타리스트가 초심을 외친다는 것은, 처음 기타를 잡았던 그때의 각오와 마음을 상기함으로 다시금 출발선상에 서겠다는 것이지, 숙달된 손가락을 잘라내고 새손가락을 갖겠다는 말은 아닌것이다. (비약이 심하지만,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만큼 성장한 오늘의 내가 과거의 나의 초심을 갖는다는 것은 분명 그때의 초심이 가져다준 각오와는 다른 차원의 비장함을 보여줄 것이다.
초심.
나에게 초심은 무엇인가?
교회의 초심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교회를 기획하신 주님의 초심은 무엇이었을까? 그 역시도 내가 깨달은 위 두가지의 사항에 해당되지 않을까?
조용히 주님의 마음을 묵상하며, 2022년 10월의 초심을 기록으로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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