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교회 개척기

예배는 삶으로 완성되고, 삶은 사람을 정의한다.

살며 생각하며

흔적에 관하여- (feat. 상처, 세월)

시소대디 2022. 11. 4. 17:37

나이가 마흔이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 즈음의 나이가 되면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가 그의 얼굴에 묻어난다는 뜻이리라. 이 말을 나는 '반복되는 생각은 흔적을 남긴다'라고 되씹어 내뱉어보고 싶다. 그렇다. 내가 평생토록 붙잡아온 생각은 이제 얼굴에 스며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른 이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는 사람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아무리 자기 중심적인 사고로 살아가는 시대라지만, 이제 불혹에 접어들면서는 위와 같은 이유로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내 생각은 얼굴을 통해 그에게 고스란히 전해졌을 것이고, 그것이 누군가로 하여금 나와 함께 하고 싶다, 그러고 싶지 않다를 결정하게 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것은 타인의 시선과 관점에 사로잡혀 주체성을 잃어버린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사실 나는 내면이 단단하지 못한 사람이라 타인의 시선에 흔들리고, 나의 행동에서 비롯된 타인의 반응에 민감한 사람이기에 한동안은 주체성을 상실한채 살아왔다. 심지어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모범이나 부교역자의 윤리라고까지 생각했고, 나의 생각과 행동을 넘어 타인에게까지 그러한 관점과 태도를 견지하기를 요청하고 가르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런 나의 성향이 누군가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다행히도 더 늦기 전에 그 의도에 따라 반응하지 않는 법까지도 배우게 되었다. 좌우간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마지막 지점에 주체로서의 '나'가 있는가 아니면 '타인'이 있는가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다시 한번 스스로를 돌아본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으로 비춰질까? 여러 세월을 지낸, 흔적을 품은 사람으로서의 '나'에게서는 어떤 흔적이 가장 진하고 뚜렷하게 보일까?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마주하는 '흔적' 가운데 가장 강렬하고도 흔한 것은 아마도 흉터가 아닐까 싶다. 흉터는 시간이 가도 자연적으로 낫지 않는다. 그때의 상처를 잊지 말라고 호소라도 하듯, 내가 이렇게 아팠음을 기억하라고 항의라도 하듯 상처나기 전의 상태로 말끔히 돌아가지 않는다. 이것이 흉터, 흔적이다. 그렇기에 흉터엔 기억이 있다. 

 

내게는 왼발바닥 엄지발가락 쪽에 흉터가 있다. 사고가 있던 그날밤의 모든 순간이 생생히 기억난다. 왜 상처가 났는지, 무슨 모임이었는지, 그리고 상처난 내 발을 수건으로 싸메고 병원으로 내달리던 엄마의 심장박동까지. 지금은 아무런 통증도, 느낌도 없이 흉터만 남아있지만, 흉터를 통해 나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 그래, 그런 날이 있었지, 그렇게 흉터엔 기억이 있다. 

 

단 한번의 사고로 생겨난 흉터에도 이처럼 시간을 초월한 기억이 새겨져 있는데, 반복해서 경험한 일상이 새겨낸 내 얼굴을 통해 드러나는 흔적은 얼마나 많은 기억을 담고 있을까? 거울을 볼 때마다 그 기억을 일일이 떠올리지 못함은, 이제 어지간한 자극에는 반응하지도 않을만큼 무뎌진 내 동심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많은 경험이 켜켜이 쌓여서 이제는 구아노처럼 굳어진 탓일까, 그도 아니면 거울 앞에서 상념에 잠길 찰나없이 쫓기듯 살아가는 일상의 분주함 때문일까.

 

부디 바라고 기도하기는 내 얼굴에 드러난 흔적이, 불혹의 내 삶에 스며나오는 내 영혼의 진액이 탐욕과 분노, 시기와 질투, 부서짐과 깨어짐이 아니기를... 그분의 온유함과 여유, 따스함과 용서함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