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교회 개척기

예배는 삶으로 완성되고, 삶은 사람을 정의한다.

살며 생각하며

경험해보지 않은 슬픔에 대하여

시소대디 2023. 9. 20. 15:23
"눈을 뜨니... 꿈이었으면 하는 몽롱한 착각을 즐길새도 없이
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서운 괴물처럼 가차 없이 육박해 왔다.
그 다음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미친 듯이 몸을 솟구치면서 울부짖을 차례였다.
그 일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식인지 아무도 모른다.
목청껏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통곡하면 소리와 함께 고통이 발산되면서
곧 환장을 하거나 무당 같은 게 되어서 죽은 영혼과 교감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러나 그런 경지까지 도달한 적은 없다.
번번이 그 직전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곤 했다.
환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박완서, '한 말씀만 하소서' 中

 

 

굳이 따지자면, 나는 경험주의자에 가깝다.

백문이 불여일견이고, 백견은 불여일촉이며, 백언이 불여일행이랄까.

그렇기에 경험하지 않은 아픔은 논할 수 없다고 여겼다. 말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만의, 타인의 슬픔을 위로, 존중하는 나름의 원칙이었다. 그런데 오늘, 저 문장을 읽는데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쿵'하는 느낌이 났다. 나는 경험해본 적 없는, 경험하고 싶지도 않은 아픔이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래서 말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여겼던 아픔이, 작가의 글을 통해 마치 내가 경험한 것처럼 생생하게 와닿았다. 

 

왜일까?

어째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작가의 슬픔에 동요되는걸까?

 

그것은,

자식을 잃어본 적은 없지만 

온 세상을 다 주어도 바꾸지 않을만큼 사랑해본 적은 있기에

이를 빼앗긴 엄마에 대한 이입이었으리라.

 

이제 경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논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유연함을 가져야겠다.

생각해보면, 세상은 내가 경험한 것보다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이 훨씬 더 많을 터이니.

중요한 것은 '아파봤는가'가 아닌 '아파하는 이를 아프게 여기는가'이겠다. 

 

 

그렇게 그리스도인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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